참여의 계기: 혼란 속에서 찾은 의미
2020년 1월, 희망제작소 이사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센터장 5년차였다. 세 번째 임기를 앞두고 민간 재단 이사 겸임 가능 여부를 정부에 확인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그해 7월 9일, 희망제작소 설립자인 박원순 시장이 사망했다.
박원순 전 시장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2006년 희망제작소를 설립한 후 2011년 서울시장 출마를 앞두고 떠났지만, 여전히 희망제작소에 미치는 상징적 영향력이 컸다. 희망제작소는 정체성의 큰 혼란기를 맞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시점에 내가 이사로 참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호혁 이사(1300K 창업자로 당시 서귀포시 거주)가 나를 추천한 이유는 창업과 로컬 경험을 통해 이사회 다양성을 높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의 동기도 있었다.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를 운영하며 정부와 정치로부터 독립적인 비영리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절감했던터라, '정부나 기업 출연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민간 연구소'이자 실천과 연구를 함께하는 'THINK & DO' 모델인 희망제작소의 운영 노하우를 배우고 싶었다.
5년간의 여정: 이사회에 참여하면서
이 글을 쓰는 시점은 2025년 8월이다. 희망제작소 이사로 참여한지 6년차를 맞이했다. 나는 2022년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임기를 마치고 8년간의 제주 생활을 정리한 후 2023년 서울로 돌아왔다. 제주에 있을 때는 코로나로 인해 주로 온라인 이사회에 참여했지만, 서울에서는 희망제작소와 가까운 곳에 살게 되어 거의 빠짐없이 현장 이사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희망제작소 이사회 참여는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으며, 희망제작소가 다음 단계로 변화하는 데 참여한데 보람을 느낀다. 애초 목적이었던 지역창업생태계 경험을 통한 기여보다는, 의외로 비영리 재단 거버넌스의 넥스트를 위한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희망제작소의 과도기에 참여한 것이 오히려 비영리 재단 거버넌스를 실천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또다른 소득도 있다. 시민사회에서 오랜 활동을 해온 훌륭한 선배 이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시간들이 시민사회에 대해 무지했던 나의 경험의 경계를 한 걸음 더 확장시켜주었다.
비영리 재단의 정체성 혼란기: 뿌리 깊은 과제의 발견
설립자 사후에 희망제작소는 오랜 정체성 혼란기를 겪었다. 하지만 이사회에 참여하고 논의하며 깨닫게 된 것은 정체성 혼란이 2011년 설립자가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 재단을 떠났을때 이미 시작되었고, 9년간 서서히 진행되왔다는 것이었다.
희망제작소는 2006년 설립 당시 '시민과 함께 사회혁신을 실천하는 싱크 앤 두 탱크(THINK & DO TANK)'라는 미션과 독립, 참여, 현장, 지역과 실용, 대안, 종합이라는 핵심가치를 세웠다. 이는 지금도 유효한 훌륭한 내용이며, 실제로 많은 혁신적 사업을 만들어냈다. 주요 성과들로는 목민관클럽(지역 공공과 정치인의 변화를 위한 학습조직 운영), 완주군 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설립 운영의 초석이 된 연구 수행)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역의 변화를 디자인하고 실천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나의 제주에서의 경험과 실천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제작소의 이런 활동과 2015년 이후 제주와 강원을 중심으로 태동한 로컬크리에이터 생태계 사이에는 단절이 있었다.
설립자가 2011년 재단을 떠나 서울 시장이 된 후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제작소는 혁신적 사업 창출보다는 정부 사업 연구용역 비중이 늘어나며 정체성이 약화되고 있었다. 후원자 그룹도 설립자 개인에 대한 지지와 공감으로 사람들이 매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고, 설립자 사망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사회의 역할 변화: 거버넌스 재정립
과도기에 부소장이었던 임주환 변호사가 2021년 소장직을 맡아서 고군분투를 했고, 3년 뒤인 2024년 3월 이은경 본부장이 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전까지 이사회는 소장 선임과 이사회 의결 외에는 재단과 사업 운영에 큰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정체성 혼란기를 맞아 이사회에서는 재단의 존재 이유와 변화 방향에 대한 심층적 토론이 시작되었다.
시민사회에 문외한인 나는 경계인으로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민간 기업과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미션, 비전, 핵심가치를 수립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희망제작소의 존재 이유와 변화 방향에 대해 발제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2024년초 희망제작소의 신임 소장 선정 TF에 참여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발제를 했다.
- 희망제작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 시대는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가?
- 희망제작소는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사회는 점점 흥미로워졌다. 관성적으로 해온 사업들이 과연 존재 이유에 부합하는지, 지속가능성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질문과 토론이 장시간 이어졌다. 보통 오후 4시에 시작된 이사회는 저녁 회식까지 이어지며 소중한 대화의 장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이사회를 통해 그동안 만나지 못한 영역의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제선·윤석인 이사장으로부터 평생 시민사회 활동 경험을 들을 수 있었고, 배규식 이사(전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와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간의 노동 관점 시대, 세대 차이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송창석(거버넌스센터 교육원장)·장유식 이사(법무법인 동서남북 변호사)로부터는 희망제작소 활동 히스토리와 고민의 과정들을 들을 수 있었다. 기업 창업자인 이호혁, 이진민 이사로부터는 기업의 경영의 노하우를 재단에 접목하는 아이디어와 제안을 배울 수 있었고, 김인선 이사(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원장), 김향자 이사(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초빙교수)로부터는 중간지원조직의 운영 노하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진행형: 성과와 과제
희망제작소의 변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후원금 반등이나 새로운 사업을 통한 대외 영향력은 아직 확실히 자리잡지 못했지만, 설립자 영향력에서 미션·비전·핵심가치 중심의 비영리 거버넌스로의 재정립에는 큰 진전이 있었다.
비영리 재단 이사회는 '우리가 왜 일하는가', '이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가'를 두고 격론을 벌여야 한다. 또한 실행 단계에서는 이사회가 자신의 네트워크를 통해 도와야 하고, 사업을 통해 후원자들에게 재단의 존재 이유와 사회적 가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희망제작소는 정체성 위기 과도기를 거쳐 새로운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이사회는 재단 지지자와 후원자를 주인으로 하는 거버넌스로 활발히 운영되기 시작했고, 연구원들은 희망제작소 일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며 씽크 앤 두 실천하는 에너지가 더 커져갔다. 무엇보다 희망제작소는 어젠다 설정-연구-실천을 이끌어내는 기존 강점을 회복해가고 있다.
임주환 소장을 거쳐 이은경 소장으로 이어지면서 CWB(Community Wealth Building) 사업이 중점 사업으로 추진되며 지자체장들의 큰 관심 속에서 목민관클럽 재활성화되어가고 있고, 소셜디자이너 사업이 지속적 확장으로 지역 변화 동력 창출해가고 있다.
[참고]
- 2025-8-1, “희망제작소·美 싱크탱크, 민주적 경제 모델 공동 추진”, 국민일보
- 2024-10, 목민관 클럽 - 지속가능한 로컬, 민주주의 경제 모델 구축, 희망제작소
미래 전망: 새로운 후원 생태계를 향해
이제 희망제작소 후원자들은 설립자에 대한 개인적 인연과 지지를 했던 시기로부터 벗어나, 비영리 재단으로서 희망제작소의 미션과 비전, 핵심가치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해갈 때다.
우리 사회가 대부분이 영리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영리와 비영리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건강한 삶과 사회를 이룰 수 있다. 경제사상가이자 컨설턴트인 피터 드러커가 인생 후반기인 1970년대부터 영리 기업보다 비영리 단체 연구와 컨설팅에 더 많이 힘썼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그런 사람들이 늘어날 때다.
정부 재원에 의존하는 비영리 활동은 정부와 정치의 거버넌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지속가능한 가치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목격해왔다. '정부로부터의 독립', '현장 중심의 실천적 연구'를 지향하는 희망제작소가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그 변화는 희망제작소 이사회와 연구진들로부터 변화하는 거버넌스로 시작되었다. 이제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함께 거버넌스를 키워나갈 때다.
[희망제작소와 함께하는 방법]
"희망제작소는 지역과 중앙이 균등하게 발전하기를, 시민들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기를, 퇴직자들이 공공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사회적경제 생태계가 풍성해지기를, 현장을 기반으로 한 교육을 통해 혁신적인 공공리더가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 희망제작소 사업과 후원:
희망제작소는 시민들의 참여로 운영됩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직접 활동하시는 것도 좋지만, 후원도 좋은 참여 방법입니다.
https://makehope.org/190?preview_mode=1
- 현재 참가자 모집 중인 주요 사업들:
- 🎯 2025 소셜디자이너 모집 (~10/31)
먹고사는 일로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가치 중심 창업가들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https://makehope.org/project/?bmode=view&idx=166931763 - 📚 소셜디자이너의 바인더 프리-시즌 (~8/17) (2025 신규 프로그램)
전환기(퇴직, 휴학, 이직, 돌봄 등)를 경험하는 분들이 사람과 로컬과 연결되며 자신의 스토리를 써내려가며 변화해가는 프로그램입니다.
https://makehope.org/project/?bmode=view&idx=166931960
- 🎯 2025 소셜디자이너 모집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