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커뮤니티 센터에서 탁구 레슨을 2년째 받고 있다. 어릴적부터 탁구를 즐겼기에 보통 이상의 실력은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늘지 않았고 잘 맞을 때도 있었지만 실수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공을 충분히 기다리지 않고 몸의 앞쪽에서 치는 습관이다. 선생님이 가르쳐준대로 충분히 기다려서 몸의 옆까지 끌어당겨 탑스핀을 걸어서 잘 들어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몸 앞에서 반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알아차리기가 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선생님이 일일이 지적해서야 내가 했다고 생각한 ‘행동’과 내 몸의 실제 ‘반응’이 달랐다는 것을 알고는 했었다.
두달 전에 하루에 두건의 미팅을 마치고 마지막 즈음에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후두염인 상태에서 목을 무리해서 그랬거니 싶었다. 그런데 조금 나아지는 듯 했지만 목소리가 한달 이상 계속 좋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후두내시경으로 보니 성대결절이라고 했다. 성대에 굳은살이 생긴거라고 한다. 한달 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굳은살은 사라진단다. 그러나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커뮤니티, 생태계의 중심에서 일해온 나는 강연, 행사, 미팅 등 말을 하는 자리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말을 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었던 것은 아니다. 20년전 다음커뮤니케이션에 팀장으로 들어갔을 때까지도 나는 개발자였고, 컴퓨터 앞에서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내가 그동안 다녔던 회사 중에 가장 큰 회사였고 나보다 포털 서비스를 개발을 잘 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팀장으로서 하루 종일 팀내외부의 미팅을 하고 나서 퇴근할 때가 되서야 내 개발을 할 시간이 생겼다. 매일매일 내가 아무 일도 안했다는 느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가 변화가 생겼다. 나는 더이상 나를 개발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시작했다. 매일 미팅을 하고 조율을 하면서,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보고 성과를 내며 모두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드는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코딩을 통해 명확한 결과물을 내던 성취감보다는 좀 긴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며 불확실성 속에서 성과와 성장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다보니 내가 맡은 조직이 130명의 본부로 확장되게 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목을 많이 쓰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11년 전에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센터장을 맡고 이후에 지역창업생태계와 관련된 책을 두권을 쓰면서, 나의 역할은 사람들을 만나고 강연을 하는 일들로 완전히 바뀌어갔다. 나는 목을 혹사시켰고 주기적으로 쉰 목소리가 나고는 했다.
의사 선생님은 나의 성대를 후두내시경으로 보더니 말했다.
“목을 오남용을 하면 성대결절이 옵니다. 남용을 하지 않으려면 말을 적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의사인 저처럼 하루종일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이라면 남용을 안할 수가 없죠. 그러면 오용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의사의 권유로 음성치료를 시작했다. 음성치료사는 성대도 근육이며, 이것을 고르고 부드럽게 닫히고 열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설명을 듣다보니, 마치 탁구 레슨을 받으며 공이 날아올 때 충분히 기다려야 하는 몸의 기억을 만들듯이, 성대에 기억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이 여겨졌다. 연습을 하면서 내 몸을 자각하고 변화를 만드는 과정이 상당히 비슷했다.
문제는 나의 정체성 혼란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성대의 결절이 사라질 때까지 최소 3개월 이상은 말을 아껴야 했다. 약속했던 강연을 취소하고 요청오는 것들도 모두 거절했다. 가고 싶었던 모임의 참여도 안하고, 사람들과의 미팅도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최소화했다. 3년 전 쓴 책 <커뮤니티 자본론>에서 ‘내가 속한 커뮤니티들이 나의 정체성을 이룬다’라고 나는 주장할 정도로 나에게 존재 의미와 활력을 주는 것이 커뮤니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줄이게 되니,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에서의 사람들과의 교류가 줄자 SNS에 포스팅을 할 내용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온라인에서의 나의 정체성도 함께 약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업무적으로 내게 아무런 성과나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이에 그동안 내게 부족했던 역량이 채워지고 새로운 성과와 성장이 일어나고 있다. 외국인 투자 자문과 메일을 주고 받으며 회사의 매출, 원가를 기업 실사 수준으로 분석하며 투자 모델을 함께 만들어보기도 하고, 이 과정을 Claude Cowork을 통해 작업하면서 많은 경험치와 노하우가 쌓여 가고 있다.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와 크립톤이 투자한 후 상장한 우주기업 컨텍의 조직컨설팅을 하면서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의 변화관리TF의 경험치를 다시 되살리고 있기도 하다. 오랜기간 방치되어 있던 크립톤 홈페이지를 이 기회에 재정비하고 콘텐츠를 개편하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20년전 개발자에서 리더가 되어갈 때 실제로 변화하고 성장하면서도 불안하고 초조했던 시기를 되돌아본다. 성대결절은 강연, 커뮤니티 등으로부터 나를 단절시켰다. 내게 익숙해진 행동 양식, 존재 양식으로부터 달라지는 과정에 혼란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기다림의 감각’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외부에서 나에게 기대해왔던 것, 요청해 왔던 것,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뒤쳐질 까봐 두려웠던 것들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해 왔던 리듬을 멈추고, 나의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지난 20년간 ‘관계의 기술’, ‘커뮤니티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기다림의 기술’을 익히는 중이다. 기다렸다가 친 공이 빗맞더라도, 그 낯선 감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계속 몸에 익혀가는 것이다. 탁구공이 내게로 날라올 때, 충분히 기다리고 치는 감각이 내 몸에 베었을 때 어떤 어려운 구질의 공에 대해서도 내가 의도하는 대로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탑스핀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성대결절로 인한 단절의 시기는 나에게 기존의 방식을 잠시 멈추도록 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키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