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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경계인'과 '의식적 디아스포라'

제3회 북향민주시민포럼 '경계인의 이중정체성과 평화적 공존' 참여 후기

경계인들이 만난 여름밤,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의 탄생

2025년 7월 26일 저녁, 35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도 서울 인사동 '코트(KOTE)'는 특별한 열기로 가득 찼다. '제3회 북향민주시민포럼'이 열린 이곳은, 서로 다른 경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만나 하나의 새로운 커뮤니티로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한 시간이 되었다.


경계에서 디아스포라로, 사유의 확장

포럼의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었다. 14세에 북한을 떠나 한국에서 21년째 살아가고 있는 조경일 작가(책 : <아오지까지>, <리얼리티와 유니티>)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온 전후석 감독(다큐 : <헤로미노>, <초선>, 책 : <당신의 수식어> )이 나란히 섰다. 조경일 작가가 주최해 온 북향민주시민포럼은 이번 3회차를 맞아, '북향민'이라는 경계인의 경험을 전 세계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사유로 확장시키는 담대한 시도를 했다.

'경계인'은 내게도 특별한 화두였다. 2015년부터 제주 창업생태계를 조성하며, 서로 다른 커뮤니티의 경계에 선 이들이 주체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 때 지역이 긍정적으로 변화함을 목격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서 <밀레니얼의 반격>에서는 '창의적 경계인'을, <커뮤니티 자본론>에서는 경계인들이 정체성을 만들어가며 창조적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날 포럼은 내가 제주와 지역에서 경험하고 사유했던 것들이 북향민과 전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조경일 작가가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었구나"라고 느꼈던 순간과 전후석 감독이 LA 폭동을 계기로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거듭나고 우연히 쿠바 한인을 만난 후 디아스포라로 거듭난 경험은, 모든 경계인이 겪는 정체성의 고뇌와 그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코트(KOTE)', 경계인들의 커뮤니티가 태동한 공간

포럼이 열린 인사동 코트(KOTE)는 단순한 장소를 넘어, 그 자체로 '창의적 경계인들의 커뮤니티'가 탄생한 특별한 공간이다. 조선 최초의 호프집과 극장이 있던 터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였던 이곳은, 안주영 대표에 의해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2020년, 내가 중소벤처기업부의 '로컬크리에이터' 사업 패널 토의에 참여했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건물주의 일방적인 철거 시도에 맞서 국내외 아티스트들이 연대하여 저항했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벽 없는 경계에서 꽃을 피운다'는 이름의 의미처럼, 코트는 경계인들이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무대였다.

우연이 만든 필연, 4년 전의 인연

놀라운 인연도 발견했다. 포럼을 기획한 조경일 작가와 류태림 매니저를 나는 4년 전인 2021년, 제주 서귀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아산나눔재단의 탈북민 창업가 프로그램 '아산상회' 3기 워크숍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두 사람은 참가자였다. 당시 한국 청년과 탈북민이 함께 팀을 이루었던 그 프로그램에서의 만남이 씨앗이 되어, 두 사람이 올해 '북향민주시민포럼'을 함께 만든 것이다. 2년 전 아산나눔재단의 매니저가 된 류태림 매니저가 나의 책 <커뮤니티 자본론>을 이미 읽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인연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끼게 했다.

포럼에 모인 30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디아스포라와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캐나다 출신 청년, 20년 전 탈북해서 한국에서 딸을 낳아 키운 여성, 실향민 아버지를 둔 오카리니스트까지. 하지만 포럼이 끝난 후, 우리는 길 위에서 한참 동안 열띤 대화를 나누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여의도에 평양냉면 먹으러 가자"는 약속과 함께, 그날 밤 인사동 코트에서는 국적과 세대, 이념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조용히 태동하고 있었다.


전후석 감독, 디아스포라로 거듭난 여정

전후석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은 '경계인'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확장해 나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여정은 여러 번의 극적인 전환을 거쳤다.

  • 1단계: 무자각의 '한국인': 미국에서 태어나 4살 때 한국으로 돌아와 성장한 그는,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 2단계: 소수자로서의 '미국인' 되기: 18세에 군 복무 문제로 미국 국적을 선택한 그는, 유승준 사건을 보며 '정당성 있는 한국 남성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미국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결심했다. 미국에서 소수자가 되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자기 인식의 전복'을 경험했다.
  • 3단계: 역사적 상처를 통한 '재미 한인'으로의 각성: 1992년 LA 폭동이 그의 정체성에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구조적 차별의 문제가 언론에 의해 한인-흑인 갈등으로 변질되고, 공권력이 한인타운을 외면하는 현실을 마주하며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한인 이민자가 아닌 '코리안 아메리칸(재미 한인)'이 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각성을 하게 되었고, 이 순간을 '종교적 경험'이라 표현했다.
  • 4단계: 세계와 만나며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의 확장: 재미 한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잠시, 중국 연변에서 '사과도 배도 아닌 사과배'로 자신을 표현하는 조선족을 만나면서 그의 세계는 다시 한번 확장되었다. 이후 쿠바에서 한인 4세를 만나 영화 <헤로니모>를 제작하며, 그는 비로소 800만 명에 달하는 전 세계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일원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조경일 작가, 간증의 굴레를 넘어, 주체적 시민으로

포럼에서는 북향민(탈북민)이 한국 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도 있었다. 조경일 작가는 북향민이 교회, 강당, 학교 등에서 북한 체제의 참상을 고발하는 '증언자' 또는 '간증'의 역할에 머무르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러한 역할은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 기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영원한 '피해자'로만 호명하고, 특정 이념의 수호자처럼 위치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그 결과, 북향민의 목소리는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라는 특정 프레임에 갇히게 되고, 한 개인의 삶과 서사는 존중받지 못한 채 정치적, 이념적 도구로 소비된다. 조 작가는 북한이탈주민의 주체적 시민성 발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책임 중 하나가 이러한 간증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온 일부 한국 기독교계에 있음을 비판했다. 포럼은 북향민이 '증언자'가 아닌 '주체적 발화자'로, '피해자'가 아닌 '민주시민'으로 바로 설 때 비로소 진정한 사회 통합이 가능하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경계에서 탄생하는 삶의 의미와 창의적 커뮤니티

전후석 감독의 말처럼, 다수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정체성에 대해 자각할 기회가 적다. 하지만 소수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에 노출되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자기검열을 하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디아스포라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다.

이날 포럼에서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개념을 빌려 '무의식적 디아스포라(unconscious diaspora)'와 '의식적 디아스포라(conscious diaspora)'를 구분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수자가 되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이들이 무의식적 디아스포라라면 , 의식적 디아스포라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경계인으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삶의 서사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북향민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딛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은 '의식적 디아스포라'가 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내가 <밀레니얼의 반격>, <커뮤니티 자본론>에서 말한 '창의적 경계인', '커뮤니티 리더'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서로 다른 커뮤니티들의 경계에 선 사람은 그저 주변인으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주체적으로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간다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날 밤 코트에 모인 우리 모두는, 바로 그 '창의적 경계인'이자 '의식적 디아스포라'였다.

포럼에서 질의 응답 시간에 나온 이야기가 화두로 남는다. 한인 디아스포라가 800만명이 되는데 그들의 이야기들이 왜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을까. 전후석 감독은 한국의 근대사를 이해하면서 많은 자각을 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제주로 이주해서 경계인이 되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난 수십년, 백여년에 걸쳐서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이야기와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들을 이해하면서, 폭넓은 사유를 하게 되고 그것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의 변화를 디자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나의 두 권의 책에 한국 근대사 이야기들을 중요한 꼭지로 담은 이유도 그렇다. 이날 코트에서 포럼이 끝나고 난 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들을 담은 콘텐츠를 만들면 언젠가 교과서가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상상해보았다. 처음 만난 사람들, 경계인들이 함께 의기투합을 하게 되는 특별한 공간 코트(KOTE)에서의 특별한 포럼이었다. 

2025.7.27 桓

전정환 2025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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