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1983년 내가 12세 때 창간된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를 독학으로 읽으며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스티브 워즈니악이 작성한 애플 인터프리터의 어셈블리 코드가 인쇄된 책자를 보며 공부하고, 학교의 성적처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산화했던 나는 매일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까 공상하고 만들어보는 재미로 살았었다. 어른들과 대등하게 함께 했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성공적인 개발자 커리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오랜 기간 개발을 손을 놓았다. 다음커뮤니케이션에 입사한 2006년(35세)에는 개발 조직을 맡았지만 내가 한 일은 실제로는 아이폰앱, 로드뷰 등 새로운 프로덕트의 PM을 맡는 일이었다. 그리고 2015년 이후부터는 지역창업생태계 조성과 액셀러레이터 일로 커리어를 바꾸어 가면서 더욱 개발과 멀어졌다. 다시 개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했지만, 여간해서는 잘 해내기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AI 에이전트 시대'에 개발과 비개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본다. 바이브 코딩의 열풍 속에서 이미 그렇게 가고 있지만, AI 에이전트는 바이브 코딩보다 더 큰 흐름을 설명해준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을 AI와 함께 하게 되는 일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주환님의 책 《AI 에이전트 생태계》를 읽으면서 철저하게 느끼게 된다.
개발자 출신 저자가 가진 독특한 관점
이 책의 저자는 인문학도에서 시작해서 개발자로, 그리고 AI 스타트업 창업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풍부하고 디테일한 관점에서 AI 에이전트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만일 그가 인문 사회학자로서 AI에 대해 썼다면, AI 에이전트들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지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렇게 정확하고 풍부하게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만일 개발자이기만 했다면 AI 에이전트 생태계에서 사회, 문화, 정책적인 고민까지 다루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언어에 대한 관심부터 시작해서 AI 개발자와 창업자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AI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기술 만능주의가 아니라 균형을 갖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 책이 중요한 미덕이다. 특히, 미국에 가서 저명한 언어학자 촘스키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촘스키가 LLM과 생성형 AI에 대해 언어학자로서 비판적 입장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점은 생성형 AI를 중심으로 한 에이전트 AI 시대에 생각해볼 중요한 또다른 관점을 제시해준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개발자여서 이 책은 구체성을 갖는다. 저자가 풍부한 비유와 사례를 통해 비개발자도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썼지만, 개발에 대한 기본적인 선이해가 없다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다소 겁이 나거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특히 저자가 다양한 AI 에이전트 프레임워크를 통해 AI 에이전트의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개발 경험이 있는 독자에게는 지적인 희열을, 비개발자에게는 약간의 기술적 장벽을 느끼게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처럼 오래전이라 해도 개발을 접했었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질문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나에게 단순한 지적 유희를 넘어, 다시 코드를 만져보고 싶다는 강한 동기를 부여했다.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책에서 소개된 아이디어를 빌려 나만의 작은 업무 자동화 에이전트를 만들어보는 것부터 시작해보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그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슈퍼휴먼'에 대한 근본적 질문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는 '슈퍼휴먼'에 대한 질문이다. "AI로 증강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어떤 능력이며, 반대로 AI가 대체하거나 모방하기 어려운 인간 고유의 가치와 능력은 무엇인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꼭 함께 토론해보고 싶다. 나날이 AI가 발전하면서 인간만의 고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깨져가고 있다. 특히 인문학자들이 AI가 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의 특성이라고 단언하는 것들이 많지만, 개발자들은 그렇게 쉽게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AI에게 의사결정을 어디까지 맡겨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매우 실질적인 고민이다. 지금의 흐름으로는 점점 더 많은 의사결정을 AI 에이전트에 맡기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낳을 윤리적 문제와 인간 능력의 쇠퇴 등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은 커져갈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구조와 사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이 책은 큰 도움이 되었다.
불평등과 권력의 재편에 대한 우려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어떻게 일에 있어서 나의 경쟁력을 키울까 생각하게 되다가, 또 한편으로는 AI 에이전트 생태계에 새롭게 등장하는 많은 문제들(이 책의 후반부에 정리된)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되기도 한다.
특히, 앞서 읽었던 《권력과 진보》의 후반부의 AI 시대에 대한 부분과 오버랩되면서 고민은 더 깊어진다. 기술의 진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가게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혁명 시대에 영국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모두가 성장하지 못했다. AI 에이전트 시대는 이대로 가면 인간의 일자리가 AI로 대체되면서 빈부 격차가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산업혁명 시대는 이후에 노동조합이라는 길항권력이 등장하고 기술 진보로 인한 생산성 향상이 직원의 임금 향상으로 이어지는 길로 갔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과연 어떻게 우리가 균형을 이루는 솔루션을 만들 수 있을까. 모두가 더 쉽게 AI 에이전트를 만들어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는 더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인가, 더 불평등한 사회가 될 것인가?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
이런 고민을 깊이 하게 되는 나는 여러 사회 경험을 겪은 54세의 중년이다. 하지만 지금 'AI 에이전트' 시대를 맞이한 12세 소년은 어떤 것들을 공상하고 만들게 될까. 지금 내가 다시 소년이라면, 아니 이 시대의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공상하고 또 만들어보게 될 것 같다. 어른들과 특별한 차이가 없이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면서.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가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가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근거와 사례를 통해 AI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이 책은 개발자와 창업자로 실리콘밸리의 전선에 서 있는 인문학 DNA를 가진 경계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반갑고, 더 묵직하다.